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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작 후일담

2025. 3. 18.

『2022』의 제작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2022』는 정수지가 독일 슈투트가르트Stuttgart로 유학을 오며 쓰기 시작한 일기입니다. 일기를 책으로 만들어 볼 수 있겠냐는 첫 의뢰를 받은 건 2022년 중순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교 학사 졸업을 앞두고 정신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선 친구이자 의뢰자인 정수지에게는 기약은 없지만 승낙해두고 그 해를 지나 보냈습니다. 그렇게 2년 후인 2024년에서야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제작 회의를 진행한 건 2024년 4월입니다. 우선 클라이언트의 일기 원고를 빠르게 살펴보며, 일기라는 개인적인 형식을 책이라는 매체로 옮길 때 무엇을 중점적으로 고려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일기를 책으로 만드려고 할 때 떠오른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기는 하루를 최소 단위로 분절되어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연속적입니다.

  2. ‘일기 쓰기’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니, 1년 단위로 책을 묶는다고 해도 전체를 관통할 일관된 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3. 마지막으로 일기 자체의 내용보다도 ‘일기 쓰기’라는 반복적인, 집요한 행동이 더 감동적이고 중요해 보였습니다.

시간은 연속적이다

일기가 하루를 최소 단위로 삼아 자신의 하루를 기록하는 글이긴 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겪는 시간은 게임을 껐다 키듯이 꺼진 부분이 있는 건 아닙니다. 수면 또한 연속된 경험이고 켜져 있는 시간의 일부분입니다. 이 생각이 책에서 표현되었으면 했습니다. 16, 17, 18, 19, 20, 21··· 하루하루가 나뉜 것처럼 일기는 쓰였지만 한 덩어리의 책 안에서 분절된 하루가 드러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에서 날짜를 제목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책이라면 목차에 제목이 있고 페이지 번호가 있지만 『2022』에서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소거했습니다. 그래도 일기에서 날짜의 요소까지 없애버릴 수는 없기에 딱 한 가지 날짜의 요소만 남겨두었습니다.

일기 쓰기는 계속된다

2024년 클라이언트와 책 제작을 위한 회의를 시작하며 확인한 건 지금 작성된 일기가 얼마나 있는지, 계속 일기를 쓰고 있는지였습니다. 일기 쓰기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면 가지고 있는 글에 대해서만 책을 제작하면 되지만, 계속되고 있다면 가능한 일관된 시리즈로 보일 수 있는 일관된 체계를 가져야 했습니다. 앞에 말한 시간은 연속적이라는 생각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특정 날짜의 일기 제목이자, 일기가 작성된 날짜를 보여주며, 페이지 번호를 대체할 수 있는 표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아래 사진의 표입니다.

이 표가 제목, 날짜, 페이지 번호의 역할을 모두 대체합니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을 때 플립북처럼 시간의 흐름을 볼 수 있게 제작했습니다.

일기보다 일기 ‘쓰기’

일기는 과연 누가 읽으려고 할까 생각했습니다. 일기를 소설책처럼 읽으려고 하진 않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처음 원고를 받고 수백 장이 넘어가는 1년 치 분량을 읽으려고 했을 때, 다 읽는 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정 날짜의 몇몇 사건은 재미있는 것도 있었지만, 솔직히 밝히면 제3자의 사생활을 읽는 게 저에겐 별로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감동을 받은 부분은 딱 하나였습니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는 점입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쓰기’라는 행동에 집중해 앞에서 언급한 표에 일일이 스탬프를 찍기로 했습니다.

위 사진의 오른쪽처럼 날짜 위에 스탬프를 찍었습니다. 이 생각은 포스터 세미나를 같이 들은 일본인 친구 케이타에게서 영향을 받은 점도 있습니다. 그 친구는 일본 아마존의 개인정보 데이터와, 독일 아마존의 개인정보 데이터 패턴이 다르다는 점을 인지하고 포스터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포스터 위에 검은색 테이프로 추가 작업을 했는데 이 점이 시각적으로 상당히 호소력 있었습니다. 정말 데이터가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2022』를 제작할 때도 대량생산, 판매를 위한 책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책 자체가 하나의 작업물처럼 기능했으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책은···

『2022』는 단 두 권만 제작했습니다. 더 이상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매 페이지에 4번의 스탬프를 찍어야 했고 한 권당 약 860페이지에 스탬프를 찍어야 해 총 3,450번 정도의 스탬프를 찍었습니다. 두 권을 제작하는데 6,900번 정도의 스탬프를 찍은 셈입니다. 우선 스탬프 잉크에도 만만치 않게 비싼 금액을 지불해야 했고 또 손가락이 너무 아팠습니다. 무엇보다 스탬프만 세 명이서 이틀 내내 찍었는데도 겨우 한 권 분량을 찍었습니다. 지속 가능한 디자인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지만 수작업으로 스탬프를 찍겠다는 생각은 단 두 권 만에 지속 불가능해 졌습니다. 컴퓨터 상에서 디자인 작업도 문제였습니다. 일기에 맞는 해당 날짜의 표를 모두 작업해야 했는데 중간에 본문에 수정이 생기거나 착오로 날짜가 밀려서 작업하는 등 실수를 하면 수정 범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용감한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2023』 책도 같은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동일한 방식의 표 작업을 했고 스탬프 대신 볼펜으로 칸을 치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단 두 권만 제작했습니다.

『2024』는 이같은 방식으로 작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2023』까지는 개인 작업으로 진행했지만, 『2024』는 EVM이 함께 작업하게 되었으니 대대적인 개선을 해야겠습니다.

2022 작업 살펴보기.
2023 작업 살펴보기.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