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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쓰는 사람들: 최승자의 『어떤 나무들은』
2025. 3. 31.
“이 사람은 어떻게 매일매일을, 글로 소화했을까?”

『어떤 나무들은』은 시인 최승자의 일기 책입니다. 1994년 8월 28일 일요일부터 1995년 1월 16일 월요일까지, 칼같이 똑 떨어지는 매일은 아니어도 융통성 있는 하루가 빼곡히 실렸습니다. 일기는 최승자가 미국 아이오와주 아이오와 대학에서 주관하는 인터내셔널 라이팅 프로그램(IWP)에 참가하기 위해 아이오와로 떠남과 동시에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해외는커녕 국내 여행과도 거리가 멀었던 그녀는 이 프로그램을 계기로 처음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시집 『이 시대의 사랑』(1981), 『기억의 집』(1989), 『즐거운 일기』(1984), 『내 무덤, 푸르고』(1993)을 출간하고 난, 마흔셋의 나이였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인생관도, 문학에 관한 정신도 ‘이미 굳어져 버린’ 시기였지만, 아마도 장소의 전환이 그녀로 하여금 시와는 다른 ‘쓰기’를 추동했던 것 같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시카고 공항으로, 시카고 공항에서 시더래피즈 공항으로 날아온 최승자는 메이플라워 기숙사에 짐을 풀었습니다. 낯선 장소에서 비감을 느끼며, 입을 움직여 어색한 구어체의 영어 문장을 발화하고, 가방 속의 라면을 꺼내 아쉬움을 의식하여 반 개만 끓여 먹는 것으로 첫 번째 하루가 시작됩니다. 현재까지도 가을 학기마다 이어지고 있는 아이오와 대학의 IWP는 작가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레지던시 개념의 프로그램입니다. 약 3개월 동안 30여개국의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시인, 소설가, 극작가들이 같은 장소에 머물며 교류합니다. 번역 워크숍을 통해 원문의 문장이 지니고 있는 아리송하고도 구체적인 감정의 혼합물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옮기는 섬세한 작업에 몰두하거나, 돌아가며 서로의 작품을 읽는 리딩 세션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일기를 써 본 사람이라면 알 것입니다. 어제와 또 다른 오늘이라는 하루에 어떤 변화된 요소가 있는지, 일기를 쓰는 동안 자연스럽게 그 차이를 포착하게 됩니다. 어떤 날씨는 기억되고 어떤 표현은 새겨집니다. 쓰이기 전까지는, 그것은 자기 자신만이 눈치챌 수 있는 미묘함에 불과합니다. 그녀의 일기를 읽다 보면, 행간에 스며든 그리움과 향수, 새롭게 접수한 삶의 손짓이며 몸짓이 파고든 복잡한 심경이 저절로 말을 걸어옵니다. 씩씩함과 애수가 한자리에 있습니다. 바뀐 잠자리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커피를 찾았다는 문장을 읽으면 그 모습이 퍽 최승자 시인답고, 외투를 챙겨 입고 새롭게 만난 동료들과 외출하는 대목을 읽으면 낯선 곳에서의 첫걸음이 어땠을지 자연히 상상이 갑니다.
그녀의 일기에는 속임수가 없다는 것을, 읽다 보면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최승자는 그저 가장 가까웠던 것과 아주 멀리 있는 것을 동시에 다루고 있습니다. 글이 글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온전히 발화된 것이 적혀 있을 뿐입니다. 스킨십이 한 두 스푼 들어가 공연히 쑥스러운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몸을 자유롭게 내맡겼던 디너 파티의 춤에 관해, 탐방하러 가듯 떠나는 식료품 쇼핑과 상상력만 갖고 시작하는 요리에 관해, 새벽에 화장실을 다녀올 때의 흐릿한 감각에 관해, 룸메이트 소냐와 나누었던 눈 맞춤에 관해.
그녀는 아이오와에서 지내는 동안 ‘단 한 줄의 시구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에 일기라는, 약간은 게슴츠레하고 그래서 여유 분방한 행색의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새벽과 밤의 어스름이 감도는 시간, 시인이 노트북컴퓨터(그녀의 표현입니다.) 앞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눈동자만큼은 또렷할 것 같습니다.

2021년 12월, 최승자의 두 번째 산문집으로 분류되는 일기 책 『어떤 나무들은』은 26년 만에 새 판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듬해 1월, 서울을 떠나 슈투트가르트에 막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막 심어진 나무의 기분으로 일상의 시, 분, 초를 또렷이 감각하고 있던 차에, 실물로 책을 만날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전자책을 구입해 읽었습니다. 그렇게 미지의 누군가가 점지해 준 운명인 듯 나와 일기(쓰기)와의 만남이 주선됐습니다. 그녀를 따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거냐고, 누군가 내게 물어온다면 아마 그렇다고 말할 것입니다. 일기를 쓰다 보니 자연히 깨달았습니다. ‘일기’라는 장르에는 다른 장르를 감히 넘보지 않는 소박함이 있습니다. 하루걸러 하루 쓰이는 과정에서 스스로 획득하는 육체성이 있습니다. 일기에는 그런 평범하고도 신묘한 힘이 숨어 있어서, 어쩌면 저절로 누군가가 쓴 일기를 궁금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그 사람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해도 말입니다.
갑자기 누군가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건 로드 맥퀸이라는 싱어송라이터가 쓴 시집 중에 나오는 구절로 대학교 1학년 때 그의 시집을 읽다가 기억해둔 것인데, 이상하게도 몇십 년이 지나면서 그의 다른 시들은 다 잊어버렸으면서도 그 구절만큼은 잊히지 않고 내 기억의 서랍 속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글쎄 오늘은 좀 외로웠나, 아니면 나의 앞날이 불안해졌나. 그 구절은 이렇다. “Lonely rivers going to the sea give themselves to many brooks.” 이건 내가 슬며시 외로운 생각이 들 때마다 나 자신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다시 되살려보곤 하는 구절이다. “바다로 가는 외로운 강물은 많은 여울에게 저를 내준다.”
(인용 출처는 이러합니다; 본문에서, 1994년 9월 6일 화요일, 51쪽)
『어떤 나무들은』은 나무가 떨어뜨리는 잎사귀 같은 단순한 나날들의 모음입니다. 땅에 떨어져 과거가 되는 순간 잎사귀는 낙엽이 되고 대부분의 낙엽은 흙에 섞여 거름이 되는 것처럼, 자연으로부터의 단순한 진리는 안도감을 선사합니다. 나무는 어디에나 있고, 작별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최승자가 나무에 갖는 인상은 이러한 것이었을까, 하고 감히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책
최승자, 『어떤 나무들은』, 난다, 2021
이 글에 등장하는 이미지
(1) 최승자의 사진 https://library.ltikorea.or.kr/writer/201247
(2) 책 사진 https://images.app.goo.gl/USEqfUsenf8f1mxJ7, https://images.app.goo.gl/fZEuGLC27deoFu1Q6
-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