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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들'-2
2025. 4. 5.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의 〈4’33”〉에는 소리가 없습니다. 악보는 있지만 음표가 없고 악상 기호가 없습니다. 그의 악보에는 오직 4/4 박자를 가리키는 기호와 높은음자리표, 낮은음자리표만 존재합니다. 또 ‘TACET’, 즉 ‘조용히’라는 악상만 쓰여 있을 뿐입니다. 처음 존 케이지의 〈4’33”〉이 초연된 1952년 미국의 뉴욕 야외공연장에서는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David. E. Tudor, 1926-1996)가 등장해 〈4’33”〉를 연주합니다.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 뚜껑을 닫아 버립니다. 33초(1악장), 2분 40초(2악장), 1분 20초(3악장) 뒤에 악보를 넘깁니다. 공연장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찹니다. 데이비드 튜더는 4분 33초가 지난 뒤 불연듯 무대 위에서 퇴장합니다. 사람들은 〈4’33”〉에 침묵이 가득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존 케이지는 〈4’33”〉 동안 ‘우연의 소리’가 무대를 가득 메워 그들의 소리가 4분 33초 동안 함께 연주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곳에는 침묵silence 같은 게 없었다. (···) 침묵이 그곳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곳에 가득 찼던 우연의 소리들accidental sounds을 어떻게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1악장에서는 바깥에서 바람이 휘젓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2악장에서는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2악장에서는 사람들은 이야기 하거나 걸어 나가며 온갖 흥미로운 소리들을 냈다. (존 케이지, 〈4’33”〉의 초연에 대해 이야기하다)
유튜브에는, 1952년 당시의 영상은 아니지만, 초연자인 데이비드 튜더가 〈4’33”〉을 연주하는 영상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의 〈4’33”〉을 재생하고, 5분 48초 동안 이미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튜더와 현재의 내가 앉아 (혹은 서거나 누워) 있는 시간 동안 어떤 소리들이 공명하는지 여러분과 함께 들어 보고 싶습니다.

존 케이지의 홈페이지에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4’33”〉을 연주한 곡을 들을 수 있고, 직접 〈4’33”〉을 연주해볼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의 정보가 있습니다. IOS 18부터는 어플이 작동하지 않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올려 둔 〈4’33”〉를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서울, taekjoo의 〈subway no.1〉을 골라 들었습니다.
배수아는 소설 『바우키스의 말』(은행나무, 2024년)에서 존 케이지의 〈4’33”〉을 떠오르게 하는 음악가를 등장시킵니다. 음악가는 주변 사람 몇몇을 즉흥 퍼포먼스에 초대합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연주회장으로 모여 들었을 때, 음악가는 두 눈을 감은 채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연주는 초대자들이 연주회장에 입장하기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초대자들보다 앞서서 연주회장 안팎의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을 향해서 귀 기울임으로써 그는 음악을 시작하고”(45쪽) 있습니다. 초대자들은 음악가가 가지고 와달라 부탁한 돌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음악가는 초대자들을 초대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곡이 연주되는 동안 누구라도, 스스로 음악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느낌이 드는 바로 그 순간에, 손에 쥔 돌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면 됩니다. (···) 그 순간 나타난 하나의 어휘를 입 밖으로 말하는 겁니다.”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은행나무, 2024년, 46쪽)
초대자는 돌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어휘를, 음절을 발음합니다. 돌은 어휘로 변신해 연주회장을 휘감습니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음절, 하나의 소리가 즉흥적이고도 우연하게 한 곡을 이루며 곡을 수행합니다. 그들의 노래를 떠올리며 생각난 악기가 있습니다. 에올리언 하프(Aeolian Harp)가 생각났습니다. 에올리언 하프는 바람이 현을 스치고 지나가며 연주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17-18세기에는 주로 창가에 에올리언 하프를 올려 두고,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공명하는 하프의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제프리 펑크(Jeffery Funk)의 에올리언 하프의 모습을 오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높이 뻗는 9.1m 가량의 차갑고 견고한 알루미늄 몸체, 차갑고 청명한 공기가 사방을 지나 현을 긋고 지나가는 소리들을 상상합니다.

바람과 공기의 공명으로 에올리언 하프는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존 케이지는 소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지만, 소리 없이 삶은 단 한순간도 지속되지 못한다고 적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 멀리 있는 친구가 보내준 노래와 비 내리는 소리가 함께 귓속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실내에 앉아 있을 때, 신체와는 전혀 맞닿을 수 없는 비는 무용하게 느껴지지만, 지붕과 벽을 뚫고 들어오는 빗소리는 신체와 맞닿으면서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소리의 작용을 피할 길은 없다. 소리는 일련의 불연속적 단계의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음장(音場)* 한가운데서 전 방향으로 전달된다. (···) 소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나 소리 없이 삶은 단 한순간도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존 케이지, 「실험 음악: 법요」, 『사일런스』, 나현영 옮김, 오픈하우스, 2014년, 15쪽.)
*음장: 음파가 있는 매질의 영역을 가리킨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1932-1986)의 두 번째 영화이자 영화학교 졸업 작품인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The skating link and the vilolin)」(1961)에서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바이올린을 배우는 어린 소년 사샤, 다른 한 사람은 증기기관차를 모는 노동자 세르게이. 세르게이는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사샤를 구해줍니다. 창 밖의 세르게이가 모는 증기기관 기계가 소리를 내며 도로를 만들 때, 창 안에서는 사샤의 바이올린 소리가 함께 흘러나오며 공명합니다. 사샤는 세르게이에게 바이올린 소리를 들려주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공명이 좋으면 소리가 좋아지고 공명이 나쁘면 소리가 나빠져요.” 세르게이와 사샤는 함께 공명하는 소리를 들으며 우정을 쌓습니다.

둘은 영화를 보러 가기로 약속합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다가왔을 때 모종의 일(영화를 보실 분을 위해 비밀로 남겨 두겠습니다)이 사샤에게 생기고, 그는 세르게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창 밖에는 세르게이가 있습니다. 사샤는 빈 오선지에 세르게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해 종이 비행기를 날립니다. 하지만 이미 세르게이는 뒤돌아 홀로 영화관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며 저는 〈4’33”〉의 소리 없는 공명과 사람들의 소리, 누군가에게 닿지 못했지만 ‘사라지지 않은’ 소리(들)을 생각했습니다. 봄의 빗소리, 조용한 일터에서의 에어컨 소리, 작게 헛기침하는 누군가의 소리, 이어폰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 소리, 멀리 있는 강물의 소리. 비어 있는 오선지에는 글자가, 예기치 않은 소리가, 시간이, 기억이 새겨집니다. 오늘 당신의 오선지에는 어떤 소리가 새겨졌나요?
내 음악은 그 바우키스의 변신의 순간에 그녀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들에 귀 기울이기입니다. 그 순간을 이루고 있던 오래된 소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한번 공명한 소리는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예를 들자면 그것은 가을이었을까. 강물은 어떤 소리를 냈을까. 그리고 바람은. 돌은. 마지막 편지의 말은. 붉은 가을이었을까. 최후의 순간 바우키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배수아, 같은 책, 52쪽)
이 글에 등장하는 사람
데이비드 튜더
배수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제프리 펑크
존 케이지
이 글에 등장하는 책
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은행나무, 2024년.
존 케이지, 『사일런스』, 나현영 옮김, 오픈하우스, 2014년.
이 글에 등장하는 영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 1961년.
사진 출처(순서대로)
존 케이지John Cage의 〈4’33”〉 악보: https://crosseyedpianist.com/2018/12/22/433-still-has-the-power-to-provoke-and-intrigue/
존 케이지John Cage의 〈4’33”〉 프로젝트 페이지: https://www.johncage.org/4_33.html
제프리 펑크Jeffery Funk의 David’s song: https://jeffreyfunkmetalworker.com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의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