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Design
책의 사각지대 -1
2025. 3. 16.
제본은 책을 육면체로 다루는 일입니다. 낱장의 종이, 즉 평면에서 시작해서 여섯 개의 면을 가진 입체를 만드는 과정을 거칩니다. 직접 그 육면체를 제작하거나 뜯어볼 때, 마치 건축가가 대지를 시작으로 입방체를 쌓아 올리듯, 틀 안의 크고 작은 공간들, 공기가 드나드는 틈을 발견하게 됩니다.
책은 나무로부터 온 사물이어서인지 항상 계절을 가지는, 다시 말해 변하지 않는 무기물보다 어느 정도 시간을 살아내는 사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계절은 인간이 살아내는 사계절보다는 그 시작과 끝이 몇 세기를 넘나들지도 모를, 길게 늘어진 생(生, life)입니다. 기요틴(Guillontine) 재단기에서 갓 잘려나간 종이의 단면을 보고 있자면, 그것은 봄의 반질함과 닮아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손을 타고 접히고 펼쳐지고 읽히고 이야기되며 농익다가, 어느날 도서관에서 발견한 몇 세기 전 죽은 시인의 시집은 가을의 낙엽처럼 빛바랜 색으로 푸석해져 있고, 그것도 모자라 사람들에게 잊혀질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가까스로 발견된 책 속에서는, 한겨울 고사목의 몸통을 손으로 쓸어 내리면 작은 접촉에도 후두둑하고 떨어지는 나무 껍질처럼, 손으로 붙잡기만 해도 으스러질 것 같은 시간을 살아낸 종이들을 봅니다. 그것은 이 입방체 안의 숨어 있는 공간들 속에 끊임없이 공기가 드나들기에 생기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한 숨 쉴 구멍이자 몇 가지 사각지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기요틴(Guillontine): 제본소에서 사용되는 대형 종이를 한 번에 자를 수 있는 절단기로, 프랑스 혁명의 단두대(guillotine)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사각지대 1 - 앞 가장자리 fore-edge
책의 앞 가장자리(fore-edge)에 해당하는 부분은 책등의 반대쪽, 즉 책을 펼치기 위해 종이를 손으로 넘기는 부분을 뜻합니다. 어릴 때 플립북(Flip book)을 가지고 놀아본 사람이라면 내지에 그려진 이미지에 몰두하는 것과 더불어 엄지를 훑고 지나가던 그 부드러운 가장자리 면의 감촉을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검지로 책의 뒷 덮개를 지탱하고 엄지로 내지를 넘기다 보면 책등을 향해 안쪽으로 휘어 있던 내지의 가장자리가 자연스레 바깥쪽으로 뻗어 나가는 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닫힘과 펼침의 사건이 발생하고 그곳에서 우리는 첫 번째 사각지대를 발견합니다.

10세기 이전 고대 필사본에서 책의 앞 가장자리는 단순히 마커를 표시하거나 제목을 적어 책을 구별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이 부분은 책이 닫혀 있을 때 움직이지 않는 면으로 인식·유지되었습니다. 16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 영역에 장식적 요소를 더히는 방식이 등장했고, 금박 장식이나 마블링 패턴이 입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주로 귀족들의 책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 사용되었지만, 마블링 무늬의 경우 책이 전산화되어 관리되기 전, 책 내지의 도난이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실용적인 기능도 겸했습니다. 책을 닫아 두었을 때 하나의 그림처럼 연결되어 보이는 이 마블링 패턴은, 특정 장이 빠지거나 페이지가 찢겨 나갈 경우 무늬가 어색하게 끊어져 유실되거나 손상된 부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아마도 이때부터 앞 가장자리는 책이 닫혀 있을 때뿐만 아니라, 책장을 조금씩 펼칠 때 드러나는 면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며, 보다 열린 공간적 영역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에서는 ‘숨겨진 앞 가장자리 페인팅(hidden fore-edge painting)' 기법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닫아 두면 금박이나 단순한 장식만 보이지만, 책장을 살짝 펼치면 그림이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이는 닫힌 책에서는 보이지 않던 공간을 활용한 기법으로, 고정되어 있던 직사각의 평면을 의도적으로 조금씩 펼쳐 늘린 후, 그 사이의 공간에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법을 통해 책이 단순한 읽기 도구를 넘어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활용되기 시작했으며, 19세기까지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대중화되면서 풍경화, 초상화, 역사적 사건 등을 그린 책들이 여럿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더 이상 평면의 납작한 공백이 아니게 된 이 영역은 점차 숨겨진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곳에 장식과 페인팅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기능을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15~16세기 중세 수도원 및 도서관에서는 앞 가장자리에 도서관 장서 표시를 남기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이는 책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실용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특정 수도원이나 학문의 전통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담고 있었습니다. 당시 필사본은 매우 값비싼 자산이었기 때문에 도난이나 분실을 방지하기 위해 수도원의 문장(紋章, coat of arms), 책의 소유자 이름, 또는 도서 번호 등을 이 면에 기록하는 일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관행은 이후 16~18세기 종교 개혁과 검열의 시대를 거치며, 지정된 금서를 숨기는 데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금서 목록에 오른 책들을 비밀리에 유통하기 위해 책의 앞 가장자리가 이러한 정보를 숨기는 장소로 활용된 것입니다. 나아가 앞 가장자리에 숨겨진 서명이나 암호, 메시지를 새기기도 했으며, 특히 영국의 청교도 혁명(1640년대)과 프랑스 혁명(1789년) 시기에 정치적 저항자들이 책을 통해 암호를 주고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중세 수도원 도서관에서는 책의 앞 가장자리가 바깥을 향하도록 책을 보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날 사용되는 책등에 제목을 표기하는 방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책의 보관방법이 달라지며 점차 가장 흔한 제본 방법으로 자리잡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앞 가장자리는 단순한 장식적 요소를 넘어, 시대에 따라 도서 관리, 검열 회피, 정치적 저항 등의 다양한 역할을 비밀리에 수행해 온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공간이 비밀스럽게 쓰였던 사례일수록,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료를 찾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구전된 이야기들만이 무성하게 떠도는, 소문을 생산하고 퍼뜨린 그 비밀의 지대를 한층 은밀하게 만듭니다. 시대를 걸쳐 여러 숨이 틈을 통해 드나들고 전해진 그 사각지대의 유연함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여전히 확장 가능한 공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순서대로)
https://typography.guru/term/fore-edge-r196/
https://nslmblog.wordpress.com/2015/04/23/fore-edge-painting-books/
https://www.pirages.com/pages/books/ST16603/fore-edge-painting-miss-c-b-currie-thomas-painter-bowdler/letters-written-in-holland
https://blogs.bl.uk/digitisedmanuscripts/2015/02/written-on-the-edge.html
-MM